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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마드 호다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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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하마드 호다반다는 사파비 왕조의 4대 샤로, 1578년부터 1587년까지 통치했다. 그는 어린 시절 헤라트 총독을 거쳐 시라즈 총독으로 재임했으며, 이스마일 2세의 급사 후 권력 투쟁 끝에 샤로 즉위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키질바쉬 부족 간의 권력 다툼과 외부 세력의 침략으로 혼란을 겪었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영토를 상실했고, 결국 아들 아바스 1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한 후 유배 생활을 하다 사망했다. 그는 시인이기도 했으며, 예술가와 문인들을 후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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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마드 호다반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흐마드 몬시 고미의 무함마드 호다반다 삽화 (세부 묘사)
칭호이란의 샤
전체 이름무함마드 호다반데
출생1532년
사망1595년 (64세)
사망 장소카즈빈 알라무트 성
매장 장소케르발라 이맘 후세인 사원
종교열두 이맘파 시아파 이슬람교
통치
즉위1578년 2월 11일
퇴위1587년 10월
이전 통치자이스마일 2세
다음 통치자아바스 1세
가족 관계
배우자하이르 알 니사 베굼
자녀함자 미르자
아부 탈리브 미르자
아바스 1세
하산 미르자
타흐마스프 미르자
샤 베굼
아버지타흐마스프 1세
어머니술타눔 베굼
왕조
왕가사파비 왕조

2. 어린 시절

솔탄 모하마드 미르자(Soltan-Mohammad Mirza)라는 이름으로 타브리즈에서 태어났다. 1537년, 사파비 제국우즈베크족으로부터 헤라트를 되찾은 직후, 4세의 어린 나이에 헤라트의 명목상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그의 '라라'(lala, 스승이자 멘토)였던 키질바쉬 아미르 무하마드 샤라프 알딘 오글리 타칼루가 쥐고 있었다. 타칼루는 1540년대 헤라트에서 관개 시설, 정원, 사원(사당) 및 기타 공공 건물을 건설하는 대규모 토목 공사를 주도했다. 이러한 노력은 샤 타흐마스프의 승인을 받았으며, 헤라트로 많은 시인, 화가(삽화가), 서예가들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았다. 솔탄 모하마드는 이 시기 헤라트에서 이들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친분을 쌓았다.[22][5]

1572년, 솔탄 모하마드는 시라즈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미 헤라트에서 시인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으며, 동시대 인물인 삼 미르자 왕자는 그를 두고 "교양이 높고 지능이 날카롭다" 또는 "교육과 인지 능력이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솔탄 모하마드는 자신이 후원하던 예술가들과 애완동물 무리를 이끌고 시라즈로 이주했다. 당시 시라즈는 15세기 후반부터 철학 연구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수준 높은 채색화 사본(필사본 삽화) 제작으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었다.[23][6] 그의 형제인 샤가 사망했을 때 솔탄-모하마드는 시라즈에 있었다.

3. 권력 투쟁과 즉위

1577년 11월 25일, 샤 이스마일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평소 건강했던 그의 죽음에 대해 궁정 의사들은 독살 가능성을 제기했다. 일반적으로 이복 누이인 파리 한 하눔이 자신에게 가혹했던 이스마일 2세에게 복수하기 위해 하렘의 여인들의 도움을 받아 독살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15] 이스마일 2세 사후, 파리 한 하눔은 즉시 권력을 장악하여 국가의 고위 관리와 부족장들은 그녀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키질바쉬 부족장들은 후계자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다. 처음에는 이스마일 2세의 8개월 된 아들 쇼자 알딘 모하마드 사파비를 샤로 세우고 파리 한 하눔이 섭정하는 방안이 거론되었으나, 부족 간의 권력 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하여 무산되었다. 결국 키질바쉬 지도부는 모하마드 호다반다를 새로운 샤로 추대하기로 결정했다.

모하마드 호다반다는 나이가 많고 시력이 매우 나빴으며(약시), 정치보다는 개인적인 취미에 몰두하는 인물이었기에 파리 한 하눔은 그의 즉위를 지지했다. 그녀는 호다반다의 약점을 이용해 실권을 유지하려 했으며, 키질바쉬 부족장들과도 호다반다를 명목상의 샤로 두고 자신들이 국가의 이익을 통제하기로 합의했다.

호다반다가 샤로 즉위한 후에도 파리 한 하눔의 권력은 막강하여, 사파비 귀족이나 관리들이 샤에게 축하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도 그녀의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호다반다의 아내이자 '마흐드 에 올야'(Mahd-e Olya)라는 칭호로 알려진 카이르 알 니사 베굼 역시 남편의 약점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1578년 2월 12일, 호다반다와 카이르 알 니사 베굼이 수도 카즈빈 외곽에 도착하면서 파리 한 하눔의 약 3개월간의 독주 시대는 막을 내렸다. 파리 한 하눔은 여전히 강력한 세력을 과시하며 4-5천 명의 호위병과 함께 가마를 타고 그들을 맞이했지만, 같은 날 카이르 알 니사 베굼의 지시를 받은 할릴 한 아프샤르에 의해 교살당했다.

권력을 장악한 카이르 알 니사 베굼은 이란을 통치하며 큰아들 함자 미르자의 지위를 높이는 데 힘썼고, 훗날 압바스 1세가 되는 작은아들 압바스 미르자에게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그러나 그녀의 통치 방식은 키질바쉬 부족의 반감을 샀고, 키질바쉬 지도자들은 샤에게 그녀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카이르 알 니사 베굼이 이를 거부하자, 1579년 7월 26일 키질바쉬 공모자들이 하렘에 침입하여 그녀를 교살했다.[24][25][7][8][16] 호다반다는 이 사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오히려 키질바시의 죄를 묻지 못하는 무력한 모습을 보였다.[16]

4. 외부의 위협

모하마드 호다반다의 통치 시기, 사파비 왕조는 외부 세력의 침략이라는 심각한 위협에 직면했다. 당시 이란 조정 내의 극심한 파벌 싸움은 이러한 외부의 위협을 더욱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다.

북동부 국경에서는 우즈베크족의 침입 시도가 있었다. 이들은 호라산 지역을 노리고 이란 북동부를 침략하려 했으나, 마슈하드 총독에 의해 격퇴되었다.[10][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즈베크족의 위협은 계속해서 호라산 지역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가장 큰 위협은 서쪽의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왔다. 1578년, 오스만 술탄 무라드 3세는 사파비 왕조 내부의 혼란을 틈타 대규모 침공을 시작했다(오스만-사파비 전쟁).[27][28] 이 전쟁은 1590년까지 이어졌으며, 사파비 왕조는 이 과정에서 아제르바이잔을 포함한 서부의 광대한 영토를 오스만 제국에게 상실하는 큰 타격을 입었다.[10][11]

4. 1.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1578-1590)

모하마드 호다반다 통치 시기 주조된 동전


모하마드 호다반다의 서명


모하마드 호다반다 재위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었다. 1578년, 오스만 술탄 무라드 3세는 사파비 왕조 내부의 극심한 혼란과 파벌 싸움을 이용하여 이란과의 전쟁을 시작했으며, 이 전쟁은 1590년까지 지속되었다.[10][11]

전쟁 초기, 술탄의 재상 랄라 무스타파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군대는 조지아와 시르반 등 사파비 영토를 침공했다. 1578년 여름이 끝나기 전에 시르반이 함락되면서 오스만 제국은 카스피해 서쪽 해안의 거의 모든 영토를 장악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현재의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중심부로 진격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1579년, 아딜 기라이 칸이 이끄는 크림 타타르족의 대규모 부대가 이 지역을 공격했으나, 미르자 살만 자비리와 함자 미르자가 지휘한 사파비 군대의 반격으로 격퇴되었다. 아딜 기라이 칸은 포로로 잡혀 당시 사파비 수도였던 카즈빈에서 처형되었다.[27][28]

그러나 사파비 왕조 내부에서는 왕비 마흐디 울리야와 군부 실세인 키질바시 세력 간의 갈등이 격화되어 1579년 마흐디 울리야가 암살당하는 등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내부 분열은 외세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16]

오스만 파샤와 페르하트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군대는 이란 내부로 계속 진격하여 1585년에는 타브리즈를 점령했다. 호다반다는 아들 함자 미르자를 보내 오스만군에 맞서게 했으나, 함자 미르자는 1586년 이 작전 중 암살되었고, 타브리즈는 이후 20년 동안 오스만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10][11][16]

오스만 제국의 계속된 침공과 더불어, 1587년부터는 북동부 호라산 지역에서 우즈베크의 샤이바니 왕조가 침입해 오는 등 사파비 왕조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 직면했다. 이러한 총체적 난국 속에서 결국 1588년 호다반다는 아들 아바스 1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된다.[17]

5. 퇴위와 말년

우즈베크족이 호라산 지역을 대규모로 침공하자,[17] 호라산의 우스타줄루 키질바시 파벌 지도자였던 무르시드 쿨리 칸은 이를 기회로 삼아 샤 호다반다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보호하고 있던 호다반다의 아들 아바스 미르자를 새로운 샤로 옹립하기로 결정했다.[29][12] 무르시드 쿨리 칸과 아바스 미르자는 수도 카즈빈으로 진격하여 1587년 10월, 아바스를 이란의 새로운 샤(아바스 1세)로 선포했다.[29][12][17] 호다반다는 이러한 쿠데타 시도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자신의 폐위를 순순히 받아들였다.[29][12]

폐위된 후 호다반다는 잠시 수도 카즈빈에서 살았으나, 이후 알라무트의 감옥으로 유배된 것으로 보인다.[29][12] 이스칸다르 베그 문시는 그가 1595년 7월 21일과 1596년 7월 10일 사이에 카즈빈에서 사망했다고 기록했다.[29][30][12][13][17]

6. 예술과 문화

모하마드 호다반다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과 가까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4세 때 헤라트의 명목상 총독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실권자였던 그의 스승 무하마드 샤라프 알딘 오글리 타칼루는 헤라트에 관개 시설, 정원, 사원 등 다양한 공공 건물을 짓는 대규모 공사를 진행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헤라트는 샤 타흐마스프의 인정을 받았고, 많은 시인, 화가, 서예가들이 도시로 모여들었다. 어린 호다반다는 이들과 교류하며 예술적 소양을 키울 수 있었다.[5] 그는 "파흐미"(فهمی|Fahmifa)라는 필명으로 시를 짓기도 한 시인이었다.[14][31]

1572년에는 시라즈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미 헤라트 시절부터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으며, 동시대 인물인 삼 미르자는 그를 "교양이 높고 지능이 날카로운" 인물로 평가했다. 호다반다는 예술가들과 애완동물들을 데리고 시라즈로 부임했는데, 당시 시라즈는 15세기 후반부터 철학 연구의 중심지였고, 아름다운 채색 필사본 제작으로도 유명한 곳이었다.[6] 이처럼 호다반다는 통치 기간 동안 예술가 및 문인들과 교류하고 이들을 후원하며 문화적인 환경 속에서 활동했다.

6. 1. 호다반다의 예술적 성향에 대한 평가

호다반다는 파흐미(فهمی|Fahmifa)라는 필명으로 를 쓴 시인이기도 했다.[31] 그의 이러한 예술적 감수성은 개인적인 재능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일각에서는 국가를 이끄는 지도자로서 필요한 강인함이나 현실 감각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오히려 그의 유약함이나 현실 문제로부터 도피하려는 성향을 보여주는 단면이라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참조

[1] 논문 Safavid dynasty http://www.iranicaon[...] 2012-08-09
[2] 서적 Safavid Iran I.B.Tauris
[3] 서적 The Persians https://books.google[...] Blackwell
[4] 서적
[5] 서적 The Practice of Politics in Safavid Iran: Power, Religion and Rhetoric I.B. Tauris
[6] 서적
[7] 서적
[8] 서적 Cambridge History of Iran
[9] 서적
[10] 서적 Cambridge History of Iran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Cambridge History of Iran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논문 Safavid dynasty http://www.iranicaon[...] 2012-08-09
[19] 서적 Safavid Iran I.B.Tauris
[20] 서적 The Persians https://books.google[...] Blackwell
[21] 서적
[22] 서적 The Practice of Politics in Safavid Iran: Power, Religion and Rhetoric I.B. Tauris
[23] 서적
[24] 서적
[25] 서적 Cambridge History of Iran
[26] 서적
[27] 서적 Cambridge History of Iran
[28] 서적
[29] 서적
[30] 서적 Cambridge History of Iran
[3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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